아내와 이혼한 후 일곱살 연하와 재혼한 ‘광수 생각’ 만화가 박광수
“힘들게 한 결혼인 만큼 더 행복하게 살 겁니다”
인기 만화가 박광수씨가 별거중이던 아내와 이혼하고 지난 6월22일 재혼했다. 상대는 일곱살 연하의 이현주씨. 몇번의 헤어짐 끝에 마침내 결혼식을 올리기까지의 사연을 본지에 단독으로 털어놓았다.
지난 6월22일, 한일월드컵대회에서 우리나라가 스페인을 이기고 4강에 진출하던 바로 그날, 인기 만화가 박광수씨(34)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잠실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에서 오후 3시에 거행될 예정이었으나 축구 시합 때문에 3시간30분이나 뒤로 늦춰져서 시작됐다.
3시간30분 동안 하객들은 대형화면으로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의 축구 경기를 보며 “대∼한민국”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며 열띤 응원을 펼쳤다. 어떤 하객은 흥분한 나머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테이블 위에 놓인 냅킨까지 흔들며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기도 했다.
연장전까지 0대0으로 숨막히는 경기를 펼치다가 마지막 승부차기에서 우리나라의 홍명보 선수가 골을 넣고 4강 진출이 확정되었을 때, 결혼식장 안은 떠나갈 듯했다. 젊은 사람, 늙은 사람,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소리를 지르며 기뻐했다.
결혼식은 그렇게 우리나라의 4강 진출의 기쁨과 함께 시작됐다. 결혼식 사회를 본 컬트삼총사는 신랑 박광수씨가 입장할 때 “신랑은 걸어나오면서 골 세리모니를 하라”고 했다. 그 말에 박광수씨가 안정환처럼 골 세리모니를 하며 입장했다.
이어진 신부 이현주씨(27)의 입장. 그가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긴 처음이었다. 약사인 아버지 이강옥씨(59)와 어머니 김광신씨(51) 사이에서 2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난 그녀는, 성신여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재원이다. 어머니 김씨는 사위 박광수씨가 한차례 결혼에 실패한 걸 알면서도 딸과의 결혼을 허락한 이유에 대해서 “딸 때문”이라고 말했다.
“왜 반대가 없었겠어요. 당연히 반대를 했죠.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딸이 좋아하고, 사위가 딸한테 잘하니까 결혼을 허락한 거죠.”
아버지 이씨는 “3개월 전에 사위가 딸을 달라고 인사를 왔을 때 처음 만났다”면서 “첫인상이 수더분하고 착해보여서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이날의 결혼식은 두 사람이 하객들 앞에서 ‘만세 사창’을 외치는 대목에서 절정에 달했다. 신랑 박광수씨는 “이현주 만세”를, 신부 이현주씨는 “박광수 만세”를 각각 손을 번쩍 들고 네번이나 외쳤다. 짓궂은 사회자 컬트삼총사가 “오늘이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4강에 진출한 날이기 때문에 만세도 네번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후 박광수씨를 만난 건 일주일간 태국으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돌아온 지 2주일 정도가 지나서였다. 7월17일, 강남 논현동에 위치한 (주)광수생각 사무실을 찾았을 때까지도 그는 인터뷰를 주저하고 있었다. 자신이 솔직하게 말해도 기사가 나온 걸 보면 의도하지 않았던 것들이 실리고, 그로 인해 자신은 물론이고 ‘아기들 엄마’(전부인을 그렇게 불렀다)나 지금 살고 있는 ‘아내’, 양가 부모님들이 모두 힘들어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7년간 함께 살았던 아내와 별거 끝에 이혼을 하고, 이혼 전에 만난 여자와 불 같은 사랑을 통해 결혼한 박광수씨였기에 그동안 받아왔던 세간의 따가운 눈총은 그에게도 깊은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박광수씨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와이프, 현주를 처음 만난 건 정확히 기억이 안 나요. 제가 원래 그런 걸 잘 기억하지 못하거든요. 99년 가을인가, 제 책이 나왔을 때 기념행사로 팬들과 같이 단체로 필리핀 여행을 갔었어요. 거기서 처음 만났죠. 그때 현주는 학생이었어요. 첫인상은… 제가 첫눈에 반하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에 생각이 잘 안 나는데… 좋은 감정은 갖고 있었어요. 이후 여행을 갔다와서 그 팀들끼리 정기적인 만남을 가졌고….”
그 말끝에 그가 이렇게 털어놓았다.
“저는 원래 이혼을 안하자는 주의예요. 아기들 엄마와 이혼을 해놓고 이런 얘기를 하면 말이 안되지만, 이혼하지 않으려고 노력도 많이 했어요. 제가 현주를 만난 것과 아기들 엄마와 사이가 벌어진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어요. 이전부터 아기들 엄마하고는 사이가 벌어졌었고 사소한 일 갖고도 자주 다투니까 이런 모습을 아이들(6세, 7세)한테 보여주는 것도 좋지 않을 거란 생각을 했지요.”
힘들 때마다 그는 이현주씨에게 인생상담을 했다. 심리학을 전공해서인지 이씨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적절하게 조언을 잘 해주었다. 그것이 또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가 이혼한 것은 결코 이씨 때문이 아니라고 거듭 말했다. 옛말에도 도둑을 맞으려면 대문을 열고 잔다고 하지 않던가. 그때는 가정적으로 너무 나쁜 일이 복합적으로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후 박광수씨는 전부인에게 고백을 했다. 여자가 있다고.
“그 얘기를 했던 이유가 다 정리하고 나도 매진할 테니까 다시 잘해보자는 뜻이었어요. 제가 원래 솔직한 성격이거든요. 그것이 인간관계에서 플러스가 될 때도 있고 마이너스가 될 때도 있는데 그 당시엔 내가 솔직해야지 아기들 엄마도 솔직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오히려 그 얘기를 해서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지는 결과가 되고 말았죠.”
한번 벌어지기 시작한 부부 사이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고민 끝에 별거하기로 했다. 그것이 2000년 5월,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혼은 생각하지 않았다. 잠시 떨어져 있어 보자는 정도였다.
별거한 후 박광수씨는 여행을 많이 다녔다. 그 사이에 이씨와는 몇번의 헤어짐이 있었다. 이씨는 그의 가정을 지켜주고 싶어했고 가정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했다. 그러던 2000년 11월, 그는 중앙 일간지에 3년8개월간 연재했던 만화 <광수생각>도 중단하고 말았다. 더이상 만화를 그릴 수 없는 심리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 때려치우고 낚시터에서 밥집이나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만화가로 복귀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현주하고도 헤어졌어요. 네번째 헤어짐이었을 거예요. 현주도 저하고 더 이상 만나지 않을 생각으로 휴대전화도 끄고 집 전화번호도 바꾸고 집에도 없었어요. 아무리 찾아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로부터 두달쯤 지나서였나, 어렵게 현주와 친한 친구의 전화번호를 알게돼 전화를 했더니 그 친구가 막 우는 거예요. ‘왜 자꾸 현주를 찾으려고 하냐’면서 ‘그냥 살라’는 거예요. 알고 봤더니 현주가 죽으려고 손목을 긋고 3일 동안 병원에서 혼수상태로 있었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고 미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녀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어느 병원에 있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후 이들이 다시 만난 건, 이씨가 병원에서 퇴원하고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힘들게 그녀를 찾아낸 그는, 그때도 “헤어지자”는 말을 들어야 했다고 한다. “나는 아직 젊고 예쁘고 잘살 수 있으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가정으로 돌아가라”는 이씨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가에 작은 이슬이 맺히는 것을 보는 박광수씨의 가슴은 더욱 저리기만 했다.
“현주 때문에 이혼한 것은 아니다. 그런 오해가 가장 힘들어”
그때부터 그의 고민은 시작됐다. 나 때문에 죽으려고까지 했던 여자한테로 가는 게 옳을까, 아니면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정으로 돌아가는 게 옳은 것인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 그리고 괴로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그를 엄습했다.
“그 당시 음반재킷을 만들고 있었는데 그 음반에 실린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었어요. 너한테는 내가 아무 쓸모가 없으니 내가 전부인 사람한테로 가겠다고요. 그 노래가 유난히 가슴에 와 닿더라고요. 그때 마음의 결정을 했던 것 같아요.”
박광수씨는 결국 작년 2월 전부인과 합치지 못하고 협의이혼을 했다. 아이들은 전부인이 맡기로 했다. 서로 맞지 않아서 비록 이혼을 한 것이지만, 이혼할 당시 그의 심정은 착잡했다고 한다. 그래도 7년을 함께 산 아내가 아닌가. 전부인과 함께 가정법원에 갔을 때 가정법원의 뜰에는 며칠 전에 내렸던 눈이 아직도 녹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싸우다 헤어진 게 아니잖아요. 이혼하면서 제일 마음에 걸렸던 부분은 아이들이었어요. 죄를 짓는 것 같았죠. 평생 아이들한테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기들 엄마한테도 사랑의 감정이 아닌, 연민의 감정이 느껴졌어요. 좋은 남자 만나서 잘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더 이상 말을 잇기가 괴로운 모양이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두웠다.
박광수씨는 전부인과 이혼한 뒤, 다시는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내 인생에 여자는 있어도 와이프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씨에게도 “우리 결혼하지 말고 그냥 살자”고 했다. 이에 대해 그녀는 ‘좋다’ ‘싫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이혼한 게 자신한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현주한테 그 말을 해놓고 내가 진짜 나쁜 놈이구나, 생각했어요. 사귀는 동안에도 마음 고생만 시켰는데 결혼식도 올리지 말고 살자니, 얼마나 서운했겠어요. 내가 현주를 처음 만났을 때 현주의 나이가 24세인가, 25세였는데 여자 나이로 보면 그때가 제일 예쁜 나이잖아요. 그 나이에 누릴 수 있는 발랄함을 포기하고 나 때문에 우울하고 힘들게 보낸 현주를 생각하면 미안해요. 그래서 웨딩드레스만이라도 제대로 입혀주고 싶었어요.”
그는 결혼 허락을 받으러 이씨의 부모를 찾아갔다. 처음에는 그녀의 어머니 김씨를 먼저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자네가 이혼한 게 우리 딸 때문이었냐?”고 물었다고 한다. 아니라고 대답을 했더니 김씨가 “둘이 그렇게 좋아하는데 결혼해야지 말려서 되겠냐”며 반 체념하는 눈치를 보였다.
“장인 어른은 저를 잘 모르시는 것 같았어요. 처음 만났을 때 직업이 만화가라고 했더니 ‘밥은 먹고 사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런데 주변 분들한테 제 얘기를 했다가 알게 되셨나 봐요. 며칠 후 고깃집에서 다시 만났어요. 가기 전부터 장인어른한테 뺨이라도 맞겠구나 각오를 단단히 했는데 시종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술만 드시는 거예요. 그러더니 고깃집에서 나올 때쯤에 한마디 하시더라고요. ‘잘살면 되지’라고요.”
박광수씨의 집에서는 어차피 그가 이혼을 했고 젊은 남자가 혼자 살 수는 없는 일이니까 재혼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이씨와 결혼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를 했다. 그것이 전 며느리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부모는 “그 아이(이현주씨) 때문에 니네 부부가 이혼한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지만 아기들 엄마한테는 어느 정도 작용을 했을 테니까 재혼은 하되 다른 여자하고 하라”고 했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결국엔 그의 부모도 반 체념 상태로 결혼을 허락했다.
“저와 현재 살고 있는 현주에게 편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람들은 남의 얘기를 너무 쉽게 하죠. 그것이 힘들 때가 있어요. 제가 사람들한테 나쁜 놈이라고 욕을 먹는 건 괜찮아요. 전 얼마든지 참을 수가 있는데 저로 인해서 현주나 저희 부모님들, 가족이 욕을 먹는 건 화가 나요.”
“‘우리 집’이란 말을 쓸 수 없는 아이들 생각하면 마음 아파”
사회적인 관념 때문에라도 한번 결혼에 실패한 그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선선히 그를 받아준 아내, 결혼해서도 잘 참고 살아주는 아내, 그런 이씨가 그는 고맙다고 한다. 사실 재혼한 후에도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중의 하나가 아이들 문제다. 보고 싶을 때마다 자주 만나는 편인데 아이들하고 헤어지고 난 후에는 늘 딜레마에 빠진다고 한다.
“아이들한테 ‘우리 집’이라는 단어가 없어졌어요. 엄마 집, 아빠 집, 그렇게 말해요. 다른 아이들은 다 ‘우리 집’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보더라도 안쓰러울 때가 많아요. 아이들 교육을 시키는 것도 문제가 되는 게 제가 일단 아이들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니까 아이들을 잘 혼내지 못해요. 매일매일 보면 아낌없이 사랑해주면서 칭찬도 해주고 잘못했을 때는 호되게 야단도 칠 텐데 가끔씩 만나니까 그 시간만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예뻐해줘야겠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잘 자라려면 엄마, 아빠한테 야단도 맞고 자라야 하는데 저는 그렇지 못하니까 내가 너무 아이들을 오냐, 오냐 하고 키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는 아이들 꿈도 자주 꾼다고 한다. 2∼3일에 한번꼴로 아이들 꿈을 꾼다고 하는데 그럴 때면 지금 살고 있는 아내, 이현주씨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잠결에 미치도록 아이들 이름을 부르는 걸 보고 혹 아내가 서운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박광수씨는 매우 안정적이고 편안해 보였다. “그동안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힘들게 한 결혼이니만큼 더 행복하게 잘살겠다”며 싱긋 웃었다. 이혼이라는 시련과 이씨와의 몇번의 헤어짐, 그리고 재혼… 어찌보면 그는 지난 몇년새 삶의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사랑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글쎄요. 어휴, 너무 어려운 질문인 것 같아요. 저도 불 같은 사랑을 하고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지만 아직도 사랑에 대해서는 모르겠어요. 어떤 것이 진정한 사랑인지요.”
역시 그는 솔직한 남자였다. 작년 9월부터 다시 <광수생각>을 연재하기 시작한 박광수씨, 시련과 아픔을 겪은 그이기에 앞으로 어떤 만화를 그릴지 궁금해진다. 그의 희망대로 오래도록 기억속에 남아 푸근함을 주는 그런 만화를 그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힘들게 한 결혼인 만큼 더 행복하게 살 겁니다”
인기 만화가 박광수씨가 별거중이던 아내와 이혼하고 지난 6월22일 재혼했다. 상대는 일곱살 연하의 이현주씨. 몇번의 헤어짐 끝에 마침내 결혼식을 올리기까지의 사연을 본지에 단독으로 털어놓았다.
지난 6월22일, 한일월드컵대회에서 우리나라가 스페인을 이기고 4강에 진출하던 바로 그날, 인기 만화가 박광수씨(34)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잠실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에서 오후 3시에 거행될 예정이었으나 축구 시합 때문에 3시간30분이나 뒤로 늦춰져서 시작됐다.
3시간30분 동안 하객들은 대형화면으로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의 축구 경기를 보며 “대∼한민국”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며 열띤 응원을 펼쳤다. 어떤 하객은 흥분한 나머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테이블 위에 놓인 냅킨까지 흔들며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기도 했다.
연장전까지 0대0으로 숨막히는 경기를 펼치다가 마지막 승부차기에서 우리나라의 홍명보 선수가 골을 넣고 4강 진출이 확정되었을 때, 결혼식장 안은 떠나갈 듯했다. 젊은 사람, 늙은 사람,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소리를 지르며 기뻐했다.
결혼식은 그렇게 우리나라의 4강 진출의 기쁨과 함께 시작됐다. 결혼식 사회를 본 컬트삼총사는 신랑 박광수씨가 입장할 때 “신랑은 걸어나오면서 골 세리모니를 하라”고 했다. 그 말에 박광수씨가 안정환처럼 골 세리모니를 하며 입장했다.
이어진 신부 이현주씨(27)의 입장. 그가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긴 처음이었다. 약사인 아버지 이강옥씨(59)와 어머니 김광신씨(51) 사이에서 2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난 그녀는, 성신여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재원이다. 어머니 김씨는 사위 박광수씨가 한차례 결혼에 실패한 걸 알면서도 딸과의 결혼을 허락한 이유에 대해서 “딸 때문”이라고 말했다.
“왜 반대가 없었겠어요. 당연히 반대를 했죠.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딸이 좋아하고, 사위가 딸한테 잘하니까 결혼을 허락한 거죠.”
아버지 이씨는 “3개월 전에 사위가 딸을 달라고 인사를 왔을 때 처음 만났다”면서 “첫인상이 수더분하고 착해보여서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이날의 결혼식은 두 사람이 하객들 앞에서 ‘만세 사창’을 외치는 대목에서 절정에 달했다. 신랑 박광수씨는 “이현주 만세”를, 신부 이현주씨는 “박광수 만세”를 각각 손을 번쩍 들고 네번이나 외쳤다. 짓궂은 사회자 컬트삼총사가 “오늘이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4강에 진출한 날이기 때문에 만세도 네번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후 박광수씨를 만난 건 일주일간 태국으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돌아온 지 2주일 정도가 지나서였다. 7월17일, 강남 논현동에 위치한 (주)광수생각 사무실을 찾았을 때까지도 그는 인터뷰를 주저하고 있었다. 자신이 솔직하게 말해도 기사가 나온 걸 보면 의도하지 않았던 것들이 실리고, 그로 인해 자신은 물론이고 ‘아기들 엄마’(전부인을 그렇게 불렀다)나 지금 살고 있는 ‘아내’, 양가 부모님들이 모두 힘들어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7년간 함께 살았던 아내와 별거 끝에 이혼을 하고, 이혼 전에 만난 여자와 불 같은 사랑을 통해 결혼한 박광수씨였기에 그동안 받아왔던 세간의 따가운 눈총은 그에게도 깊은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박광수씨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와이프, 현주를 처음 만난 건 정확히 기억이 안 나요. 제가 원래 그런 걸 잘 기억하지 못하거든요. 99년 가을인가, 제 책이 나왔을 때 기념행사로 팬들과 같이 단체로 필리핀 여행을 갔었어요. 거기서 처음 만났죠. 그때 현주는 학생이었어요. 첫인상은… 제가 첫눈에 반하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에 생각이 잘 안 나는데… 좋은 감정은 갖고 있었어요. 이후 여행을 갔다와서 그 팀들끼리 정기적인 만남을 가졌고….”
그 말끝에 그가 이렇게 털어놓았다.
“저는 원래 이혼을 안하자는 주의예요. 아기들 엄마와 이혼을 해놓고 이런 얘기를 하면 말이 안되지만, 이혼하지 않으려고 노력도 많이 했어요. 제가 현주를 만난 것과 아기들 엄마와 사이가 벌어진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어요. 이전부터 아기들 엄마하고는 사이가 벌어졌었고 사소한 일 갖고도 자주 다투니까 이런 모습을 아이들(6세, 7세)한테 보여주는 것도 좋지 않을 거란 생각을 했지요.”
힘들 때마다 그는 이현주씨에게 인생상담을 했다. 심리학을 전공해서인지 이씨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적절하게 조언을 잘 해주었다. 그것이 또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가 이혼한 것은 결코 이씨 때문이 아니라고 거듭 말했다. 옛말에도 도둑을 맞으려면 대문을 열고 잔다고 하지 않던가. 그때는 가정적으로 너무 나쁜 일이 복합적으로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후 박광수씨는 전부인에게 고백을 했다. 여자가 있다고.
“그 얘기를 했던 이유가 다 정리하고 나도 매진할 테니까 다시 잘해보자는 뜻이었어요. 제가 원래 솔직한 성격이거든요. 그것이 인간관계에서 플러스가 될 때도 있고 마이너스가 될 때도 있는데 그 당시엔 내가 솔직해야지 아기들 엄마도 솔직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오히려 그 얘기를 해서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지는 결과가 되고 말았죠.”
한번 벌어지기 시작한 부부 사이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고민 끝에 별거하기로 했다. 그것이 2000년 5월,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혼은 생각하지 않았다. 잠시 떨어져 있어 보자는 정도였다.
별거한 후 박광수씨는 여행을 많이 다녔다. 그 사이에 이씨와는 몇번의 헤어짐이 있었다. 이씨는 그의 가정을 지켜주고 싶어했고 가정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했다. 그러던 2000년 11월, 그는 중앙 일간지에 3년8개월간 연재했던 만화 <광수생각>도 중단하고 말았다. 더이상 만화를 그릴 수 없는 심리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 때려치우고 낚시터에서 밥집이나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만화가로 복귀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현주하고도 헤어졌어요. 네번째 헤어짐이었을 거예요. 현주도 저하고 더 이상 만나지 않을 생각으로 휴대전화도 끄고 집 전화번호도 바꾸고 집에도 없었어요. 아무리 찾아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로부터 두달쯤 지나서였나, 어렵게 현주와 친한 친구의 전화번호를 알게돼 전화를 했더니 그 친구가 막 우는 거예요. ‘왜 자꾸 현주를 찾으려고 하냐’면서 ‘그냥 살라’는 거예요. 알고 봤더니 현주가 죽으려고 손목을 긋고 3일 동안 병원에서 혼수상태로 있었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고 미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녀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어느 병원에 있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후 이들이 다시 만난 건, 이씨가 병원에서 퇴원하고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힘들게 그녀를 찾아낸 그는, 그때도 “헤어지자”는 말을 들어야 했다고 한다. “나는 아직 젊고 예쁘고 잘살 수 있으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가정으로 돌아가라”는 이씨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가에 작은 이슬이 맺히는 것을 보는 박광수씨의 가슴은 더욱 저리기만 했다.
“현주 때문에 이혼한 것은 아니다. 그런 오해가 가장 힘들어”
그때부터 그의 고민은 시작됐다. 나 때문에 죽으려고까지 했던 여자한테로 가는 게 옳을까, 아니면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정으로 돌아가는 게 옳은 것인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 그리고 괴로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그를 엄습했다.
“그 당시 음반재킷을 만들고 있었는데 그 음반에 실린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었어요. 너한테는 내가 아무 쓸모가 없으니 내가 전부인 사람한테로 가겠다고요. 그 노래가 유난히 가슴에 와 닿더라고요. 그때 마음의 결정을 했던 것 같아요.”
박광수씨는 결국 작년 2월 전부인과 합치지 못하고 협의이혼을 했다. 아이들은 전부인이 맡기로 했다. 서로 맞지 않아서 비록 이혼을 한 것이지만, 이혼할 당시 그의 심정은 착잡했다고 한다. 그래도 7년을 함께 산 아내가 아닌가. 전부인과 함께 가정법원에 갔을 때 가정법원의 뜰에는 며칠 전에 내렸던 눈이 아직도 녹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싸우다 헤어진 게 아니잖아요. 이혼하면서 제일 마음에 걸렸던 부분은 아이들이었어요. 죄를 짓는 것 같았죠. 평생 아이들한테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기들 엄마한테도 사랑의 감정이 아닌, 연민의 감정이 느껴졌어요. 좋은 남자 만나서 잘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더 이상 말을 잇기가 괴로운 모양이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두웠다.
박광수씨는 전부인과 이혼한 뒤, 다시는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내 인생에 여자는 있어도 와이프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씨에게도 “우리 결혼하지 말고 그냥 살자”고 했다. 이에 대해 그녀는 ‘좋다’ ‘싫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이혼한 게 자신한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현주한테 그 말을 해놓고 내가 진짜 나쁜 놈이구나, 생각했어요. 사귀는 동안에도 마음 고생만 시켰는데 결혼식도 올리지 말고 살자니, 얼마나 서운했겠어요. 내가 현주를 처음 만났을 때 현주의 나이가 24세인가, 25세였는데 여자 나이로 보면 그때가 제일 예쁜 나이잖아요. 그 나이에 누릴 수 있는 발랄함을 포기하고 나 때문에 우울하고 힘들게 보낸 현주를 생각하면 미안해요. 그래서 웨딩드레스만이라도 제대로 입혀주고 싶었어요.”
그는 결혼 허락을 받으러 이씨의 부모를 찾아갔다. 처음에는 그녀의 어머니 김씨를 먼저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자네가 이혼한 게 우리 딸 때문이었냐?”고 물었다고 한다. 아니라고 대답을 했더니 김씨가 “둘이 그렇게 좋아하는데 결혼해야지 말려서 되겠냐”며 반 체념하는 눈치를 보였다.
“장인 어른은 저를 잘 모르시는 것 같았어요. 처음 만났을 때 직업이 만화가라고 했더니 ‘밥은 먹고 사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런데 주변 분들한테 제 얘기를 했다가 알게 되셨나 봐요. 며칠 후 고깃집에서 다시 만났어요. 가기 전부터 장인어른한테 뺨이라도 맞겠구나 각오를 단단히 했는데 시종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술만 드시는 거예요. 그러더니 고깃집에서 나올 때쯤에 한마디 하시더라고요. ‘잘살면 되지’라고요.”
박광수씨의 집에서는 어차피 그가 이혼을 했고 젊은 남자가 혼자 살 수는 없는 일이니까 재혼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이씨와 결혼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를 했다. 그것이 전 며느리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부모는 “그 아이(이현주씨) 때문에 니네 부부가 이혼한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지만 아기들 엄마한테는 어느 정도 작용을 했을 테니까 재혼은 하되 다른 여자하고 하라”고 했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결국엔 그의 부모도 반 체념 상태로 결혼을 허락했다.
“저와 현재 살고 있는 현주에게 편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람들은 남의 얘기를 너무 쉽게 하죠. 그것이 힘들 때가 있어요. 제가 사람들한테 나쁜 놈이라고 욕을 먹는 건 괜찮아요. 전 얼마든지 참을 수가 있는데 저로 인해서 현주나 저희 부모님들, 가족이 욕을 먹는 건 화가 나요.”
“‘우리 집’이란 말을 쓸 수 없는 아이들 생각하면 마음 아파”
사회적인 관념 때문에라도 한번 결혼에 실패한 그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선선히 그를 받아준 아내, 결혼해서도 잘 참고 살아주는 아내, 그런 이씨가 그는 고맙다고 한다. 사실 재혼한 후에도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중의 하나가 아이들 문제다. 보고 싶을 때마다 자주 만나는 편인데 아이들하고 헤어지고 난 후에는 늘 딜레마에 빠진다고 한다.
“아이들한테 ‘우리 집’이라는 단어가 없어졌어요. 엄마 집, 아빠 집, 그렇게 말해요. 다른 아이들은 다 ‘우리 집’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보더라도 안쓰러울 때가 많아요. 아이들 교육을 시키는 것도 문제가 되는 게 제가 일단 아이들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니까 아이들을 잘 혼내지 못해요. 매일매일 보면 아낌없이 사랑해주면서 칭찬도 해주고 잘못했을 때는 호되게 야단도 칠 텐데 가끔씩 만나니까 그 시간만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예뻐해줘야겠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잘 자라려면 엄마, 아빠한테 야단도 맞고 자라야 하는데 저는 그렇지 못하니까 내가 너무 아이들을 오냐, 오냐 하고 키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는 아이들 꿈도 자주 꾼다고 한다. 2∼3일에 한번꼴로 아이들 꿈을 꾼다고 하는데 그럴 때면 지금 살고 있는 아내, 이현주씨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잠결에 미치도록 아이들 이름을 부르는 걸 보고 혹 아내가 서운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박광수씨는 매우 안정적이고 편안해 보였다. “그동안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힘들게 한 결혼이니만큼 더 행복하게 잘살겠다”며 싱긋 웃었다. 이혼이라는 시련과 이씨와의 몇번의 헤어짐, 그리고 재혼… 어찌보면 그는 지난 몇년새 삶의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사랑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글쎄요. 어휴, 너무 어려운 질문인 것 같아요. 저도 불 같은 사랑을 하고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지만 아직도 사랑에 대해서는 모르겠어요. 어떤 것이 진정한 사랑인지요.”
역시 그는 솔직한 남자였다. 작년 9월부터 다시 <광수생각>을 연재하기 시작한 박광수씨, 시련과 아픔을 겪은 그이기에 앞으로 어떤 만화를 그릴지 궁금해진다. 그의 희망대로 오래도록 기억속에 남아 푸근함을 주는 그런 만화를 그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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